코스피 4226 최고치 경신 , 반도체 랠리인가 거품의 전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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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인 상승, 그러나 비정상적인 속도
코스피가 단숨에 4220선을 돌파했다. 한국 증시 역사상 이런 속도는 전례가 없다. 연초만 해도 2400선을 맴돌던 지수가 10개월 만에 거의 두 배 가까이 치솟은 셈이다. 숫자만 보면 축제 분위기지만, 이렇게 가파른 상승은 단순히 ‘좋다’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시장이 정상적인 속도로 성장해온 과거 패턴을 감안하면 이번 랠리는 지나치게 빠르고, 지나치게 뜨겁고, 어쩌면 지나치게 불안하다.
지난 10년간 코스피는 평균적으로 연 5~10%의 완만한 상승세를 유지했다. 2012년에서 2018년까지는 2000선 초반에서 2500선까지 오르는 데 6년이 걸렸고, 이후 미·중 무역전쟁과 코로나19를 거치며 3000선을 돌파하는 데 다시 3년이 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과 10개월 만에 4000선을 훌쩍 넘었다. 통계적으로 따지면 과거 평균보다 다섯 배 이상 빠른 성장이다. 언덕길을 천천히 오르던 자동차가 갑자기 급경사에서 터보를 단 셈이다. 엔진이 좋아진 건지, 브레이크가 고장난 건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반도체가 이끄는 랠리,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탈출?
이번 상승의 주된 동력은 반도체다.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 대형 기술주가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 급증에 힘입어 폭발적인 주가 상승을 보이며 지수를 끌어올렸다. 여기에 수출 회복과 정부의 기업지배구조 개선 기대가 맞물리며 외국인 자금이 빠르게 유입됐다. 은행 예금에서 약 10조 원 이상이 증시로 이동했다는 통계까지 나왔다. 돈이 돈을 부르는 전형적인 유동성 장세의 시작이다.
이른바 ‘한국판 나스닥 랠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오랫동안 한국 증시는 낮은 배당률과 복잡한 지배구조 탓에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불리며 저평가되어 왔다. 그런데 이번 랠리는 그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확대와 배당 정책 개선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 흐름이 지속될 경우 구조적 리레이팅(재평가)이 가능하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불균형한 상승, ‘편향된 과열’의 그림자
하지만 상승의 밑단을 들여다보면 균형이 깨져 있다. 코스피의 상승분 중 대부분은 반도체, 2차전지, AI 테마 등 소수 업종에서 발생했다. 시장 전체가 고르게 상승하는 구조가 아니라 일부 대형주의 ‘견인 효과’에 의존하고 있다. 중소형주, 내수주, 제조업 전통 섹터는 여전히 제자리다. 숫자상 지수는 치솟았지만, 그 내부는 비어 있는 셈이다. 실물경기 회복 속도는 더디고 내수 부진도 여전하다. 눈으로는 호황인데, 손으로는 체감되지 않는 괴리감이 크다.
문제는 이런 불균형이 장기적으로 시장의 불안정성을 키운다는 점이다. 특정 업종이 무너지면 지수 전체가 급락할 위험이 커진다. 이는 ‘속도의 대가’를 치르는 전형적 과정이 될 수 있다. 버블은 대부분 ‘전체의 성장’이 아니라 ‘일부의 폭주’에서 시작된다.
투자 심리의 과열, FOMO가 만든 환상
최근 투자자들 사이에선 ‘지금 안 사면 늦는다’는 조급함이 퍼져 있다. 언론이 ‘신고가 랠리’라는 표현을 반복할수록 시장엔 열기가 번진다. 그러나 주식시장에서 ‘열기’는 언제나 ‘위험’의 다른 이름이었다. FOMO(Fear of Missing Out), 즉 놓칠까 두려워서 뛰어드는 심리는 대체로 거품의 시작을 알렸다. 2008년 금융위기 직전, 2021년 미국 기술주 버블, 2021년 초 한국의 ‘동학개미 열풍’이 모두 그랬다. 당시에도 “이번은 다르다”는 말이 유행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투자심리가 이성보다 앞설 때, 시장은 항상 반전했다. 지금의 코스피도 그 길 위에 있다. 상승을 이끌던 기대가 언제 현실과 충돌할지 모른다. 기대가 꺾이면 유동성은 가장 먼저 빠져나간다. 코스피의 상승 속도만큼이나 하락 속도도 빠를 수 있다.
제도 리스크와 정책 변수의 함정
이번 랠리는 정부가 추진 중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정책에 상당 부분 기댄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 자사주 매입, 배당 확대 등 주주친화적 제도가 시장 기대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 개혁이 실제로 이행되지 않거나 정치적 이해관계로 지연된다면, 시장은 급속히 냉각될 수 있다. 외국인 자금은 들어올 때보다 나갈 때 훨씬 빠르다. 최근 원화 환율이 등락을 반복하며 불안한 흐름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세제 개편, 금융규제 강화, 총선 이후 정책 방향 등 정치적 변수도 무시할 수 없다. ‘개혁 기대감’이 지수의 절반 이상을 먹여 살리고 있는 현재, 개혁의 동력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기대의 거품뿐이다.
글로벌 변수, ‘AI 버블’의 연쇄 가능성
미국의 금리 인하 시점이 여전히 불확실하고, 유럽과 중국 경기 둔화 조짐도 명확하다. 글로벌 수요가 꺾이면 한국의 수출은 즉시 영향을 받는다. 특히 AI 산업의 과열은 일종의 ‘테마 버블’로 발전할 위험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설비 투자와 칩 생산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지만, 수익성은 그만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만약 수요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지금의 반도체 랠리는 거품의 껍질을 벗기듯 빠르게 꺼질 수 있다.
결국 한국 증시는 세계 경기의 미세한 진동에도 흔들리는 구조다. 미국 나스닥이 흔들리면 코스피도 휘청인다. 지금의 고점은 글로벌 유동성과 심리의 교집합 위에 있다. 따라서 한국 증시의 향방을 예측하려면 국내 기업 실적만이 아니라, 미국 기술주의 사이클까지 함께 봐야 한다.
‘속도의 함정’을 넘어, 지속성의 시험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랠리를 단순한 버블로 치부하기엔 이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고, 기업들의 배당 확대와 주주환원정책이 구조적으로 시장 체질을 바꾸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이 흐름이 꾸준히 이어진다면, 코스피의 이번 상승은 ‘속도의 함정’을 넘어 ‘체질 개선의 서막’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핵심은 속도가 아니라 지속성이다. 시장은 언제나 급등보다 유지에 실패해서 무너졌다. 지금의 코스피는 그 시험대 위에 서 있다. 유동성, 심리, 정책, 실적—all in one. 이 네 축 중 하나만 흔들려도 시장은 균형을 잃는다. 코스피의 4220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한국 경제가 체질을 바꿀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는 시험지다.
시장은 늘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리고 욕망은 언제나 이성보다 빠르다. 지금의 코스피는 바로 그 욕망의 속도 위에서 질주하고 있다. 과연 이번에는 예외일까, 아니면 또 한 번의 ‘속도의 대가’를 치를까. 정답은 아직 없다. 다만 확실한 건, 모든 랠리는 결국 ‘균형’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코스피는 상승의 환호와 동시에, 되돌림의 예고편을 함께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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