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이거 맛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확신을 잃어버린 과학적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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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선택의 굴레와 '같아요' 화법의 생존학… 고맥락 사회의 리스크 관리법
2026년 1월 2일, 대한민국 직장인 김 대리(29)의 점심시간. "김 대리, 오늘 메뉴 뭐 먹을까?"라는 부장의 질문에 그는 반사적으로 대답한다. "글쎄요, 어제 파스타 먹었으니 오늘은 한식이 좋을 것 같아요." 맛집에 도착해서도 평가는 모호하다. "음, 간이 딱 맞는 것 같아요." 김 대리는 분명 지금 밥을 먹고 있고, 맛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왜 자신의 미각조차 '추측'의 영역으로 넘기는 걸까.
최근 MZ세대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이른바 '같아요 증후군'. 단순히 자신감이 없어서일까? EBS 지식채널e가 조명한 인간의 심리와 뇌과학, 그리고 최신 데이터 분석을 통해 우리가 "같아요" 뒤에 숨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파헤쳤다.
24가지 잼의 저주 : 뇌는 선택을 싫어한다
미국 컬럼비아대 쉬나 아이엔가 교수의 유명한 '잼 실험'은 이 현상의 첫 번째 단서를 제공한다. 마트에 24종의 잼을 진열했을 때와 6종만 진열했을 때, 구매율은 놀랍게도 6종일 때 10배나 더 높았다. 선택지가 늘어나면 우리 뇌는 축제가 아니라 과부하 상태에 빠진다.
현대인은 눈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수천 번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넷플릭스 영화 고르다 밤을 새우고, 배달 앱 리뷰를 정독하다 식욕을 잃는 일상은 흔하다. 2025년 12월 전자신문 보도에 따르면, 디지털 기기 과사용으로 인한 '뇌 피로'와 주의력결핍(ADHD) 성향은 30대에서도 급증하는 추세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비례해서 커진다. 뇌과학적으로, 자신이 내린 결정이 잘못됐다고 인지하는 순간 행복 호르몬인 '도파민' 분비는 급격히 감소한다. 즉,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쾌감을 피하기 위해 '확실한 선택'을 유보하고 "그런 것 같아요"라는 회색지대로 도망치는 것이다.
고맥락(High-Context) 사회의 생존 키트 : 눈치
하지만 한국의 "같아요"는 단순한 결정 장애를 넘어선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은 대표적인 '고맥락 문화' 사회다. 말의 내용보다 말하는 상황, 눈빛, 분위기가 더 중요한 사회라는 뜻이다.
- 저맥락(미국·독일) : "이 보고서는 틀렸습니다." (사실 중심)
- 고맥락(한국·일본) : "이 부분은 다시 한번 확인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관계 중심)
이곳에서 단정적인 말투는 자칫 무례하거나 공격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국립국어원의 2024년 국어 사용 실태 조사에서도 젊은 층, 특히 여성일수록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완곡한 표현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결국 "같아요"는 우유부단함의 징표가 아니라, 타인과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장착한 '사회적 에어백'인 셈이다.
우리가 '같아요'를 쓰는 3가지 이유
- 방어 기제 : 틀렸을 때 돌아올 비난과 책임 회피 ("내가 그렇다고 했지, 확실하다곤 안 했잖아?")
- 관계 유지 :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하지 않고 존중한다는 뉘앙스 전달 (공손 전략)
- 뇌의 절전 모드 : 정보 과잉 시대, 판단을 유보해 에너지 소모를 줄이려는 본능
'같아요'가 만든 안개 속의 리스크
문제는 이 '생존 전략'이 역설적으로 더 큰 불안을 낳는다는 점이다. 모든 대화가 "그런 것 같아요"로 끝나면 정보의 신뢰도는 떨어진다. 비즈니스 미팅에서 "성공할 것 같아요"라는 말은 투자자에게 "실패할 수도 있다"는 시그널로 읽힌다.
책임 소재를 흐리는 화법은 '위험 사회'에서 리스크를 관리하는 도구일지 모르나, 동시에 '고독한 군중'을 양산한다. 내 감정조차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 "사랑하는 것 같아요"라고 타자화(他者化)할 때, 우리는 자신의 진짜 마음과 마주할 기회를 잃는다. 2023년 대학내일20대연구소 조사에서 MZ세대의 70.9%가 정신건강 관리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답한 것은, 이러한 모호함 속에서 오는 자아의 불안정과 무관하지 않다.
모호함의 비용은 복리로 불어난다
수학적으로 볼 때, 정보량(변수)이 무한대로 발산하는 현대 사회에서 '확실성(P=1)'을 담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같아요"라는 확률적 화법(0 < P < 1)의 사용 빈도는 앞으로도 우상향할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AI가 정보를 요약해주고 알고리즘이 취향을 골라주는 시대에, 인간의 '주체적 결정권'은 더욱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같아요'가 내 삶의 주어까지 잠식하게 둬선 안 된다. 점심 메뉴 같은 사소한 결정부터 "나는 이걸 좋아해"라고 마침표를 찍는 연습이 필요하다. 확률 99%의 추천 알고리즘보다, 내가 선택한 1%의 실패가 내 인생에는 더 확실한 정답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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